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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WO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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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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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종언

共産主義 終焉 / Desition of communism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부모님이 공산주의 혁명 이후 70년 내에 공산주의가 종식될 것을 선포한 것.

[내용] 참부모님은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 70년 내에 공산주의가 종식될 것을 예견하고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종언을 말씀했으며, 1985년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세계의 여러 저명한 학자들 앞에서 ‘공산주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공산주의 종언의 선언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적화를 목표로 한 국제공산주의는 급속도로 팽창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에 심대한 위협이 될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1970년대 말부터 1985년까지를 제2의 냉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소련과 미국의 대립은 극심했다. 소련의 군사력은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강한 상황이었다. 소련제국의 경제는 피폐하여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강대한 소련의 도전은 위협적이었다. 참부모님은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하여 소련의 핵무기 선제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구상)계획을 지원하였다. 천문학적인 예산의 부담으로 주저하던 여론을 뒤집어 레이건 정부가 SDI전략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참부모님은 카우사(CAUSA)운동을 전개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카우사는 남북미통일연합(Confederation of Associations for the Unity of the Societies of the Americas)의 약자이다. 스페인어로 카우사는 ‘제1원인, 곧 하나님’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카우사는 유신론적 통일운동으로 무신론적 공산주의 노선을 극복하는 지도자들의 연합기구였다. 카우사는 남북미의 주요 국가들을 대상으로 승공운동을 전개했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사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밖에도 참부모님은 통일운동에 총력을 기울여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그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한 대대적인 승공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 종언에 대한 참부모님의 예언

참부모님은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탄 세계인 공산주의도 1917년에서 40년 동안 전성기를 맞이한 후 1957년부터는 중공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30년 동안 내려가서 도합 70년이 되는 기간에는 전멸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의 몰락을 예언해 왔다.

참아버님은 1985년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던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를 앞두고 의장으로 취임한 시카고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인 몰튼 카플란 박사를 댄버리교도소로 불러서 만났다. 몰튼 카플란 박사는 시카고대학교의 명예교수이자 브루킹스연구소와 프린스턴대학 국제문제연구소, 허드슨연구소의 연구원을 역임했고 전략외교연구센터의 소장도 역임한 인물이었다. 참아버님은 몰튼 카플란 박사에게 ‘소련제국의 붕괴’를 선포하라고 요구했다. 처음에 몰튼 카플란 박사는 정치학자의 양심에 따라 소련제국의 붕괴라는 엄청난 선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학자들이 그와 같은 예측을 선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뜻이었다. 몰튼 카플란 박사는 참아버님께 ‘어쩌면(maybe)’라는 말을 쓰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참아버님은 단호히 거부했으며 “당신이 나를 그 정도밖에 못 믿는다면, 아예 그 의장직을 내놓으시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오.”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몰튼 카플란 박사는 반신반의하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멸망이 5년 이내로 다가왔다.”고 선언하였다. 후일 몰튼 카플란 박사는 1993년 8월호 『세계사상』지에 “1985년 제네바에서 문선명 선생이 개최한 ‘소련제국의 붕괴’를 테마로 한 세계평화교수협의회의 국제회의가 열렸고, 내가 공동의장을 맡았습니다. 당시의 소련은 아직 그 세력을 세계에 확대하고 있던 공고한 체제라고 생각했으며, 동 회의의 테마는 많은 학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의 붕괴가 시작됐습니다. 실은 동 회의에 앞선 1983년의 한국 세계평화교수협의회 회의 때, 문선명 선생은 세계에서 온 학자들을 앞에 두고 예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연을 했습니다. 나도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 너무 대담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그것은 ‘소련 체제는 3년 이내에 흔들리기 시작하고, 7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나는 다시 문 선생의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걸린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라고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

1985년 8월 13-17일 스위스 제네바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의 주제는 ‘소련제국의 붕괴; 포스트 소비에트의 전망(The Fall of the Soviet Empire: Prospects for Transition to a Post-Soviet World)’이었다. 스위스 제네바 인터콘티넨탈호텔 바로 옆에는 소련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에서 학자들은 담대하게 소련제국의 붕괴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하였다. 회의는 12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됐고, 90여 명의 논문 발표자와 세계 100여 개 국가의 세계평화교수협의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소련제국주의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발표가 있었다. 당시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제네바를 비롯한 자유세계의 시민들은 이와 같은 주제발표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국제회의가 종료된 후 소련은 참아버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케이지비(KGB)를 활용하여 미국 내 참아버님의 평판을 훼손하는 공작을 진행했고, 참아버님의 일가를 테러할 음모도 꾸몄다.

그러나 국제회의 후 4년이 지나지 않아 1989년 후반부터 동유럽의 공산정권에서부터 자유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국경에 설치돼 있던 50여 개 초소들이 차례로 개방되면서 동서독 주민들의 자유왕래가 시작됐다. 이어서 소련 전대통령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1989년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소련연방이 무너졌다. 또한 동유럽에 개혁의 도미노 현상이 급류를 타면서 공산주의 종언이 현실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