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共産主義 / Communism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인형 인생관이 결실된 사상.
[내용]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계급과 사유재산을 소멸하고 인간 평등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공산주의의 어원인 라틴어 ‘콤무네(commune)’는 ‘함께 하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공산(共産)’은 함께 소유하고 생산한다는 뜻이다. 개인이 재산을 독점할 때 나타나는 폐해를 막기 위해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이상을 지향하는 철학·정치·경제·사회·예술적 이념의 전반을 가리킨다. 공산주의 양상은 원시사회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지만 이론적 체계화는 19세기 말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비롯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물질적 존재로서 생산 활동을 영위하는 사회적·역사적 존재이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활동한 시대는 초기 자본주의시대로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였다.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고,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으며, 심각한 질병과 범죄에 노출돼 있었다. 반면에 자본가의 집단은 노동자를 도구화해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풍족한 생활을 이어 갔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산물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생산관계의 불균형 속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의 심각한 인간성 상실을 목도했으며, 이를 노동으로부터의 ‘자기 소외’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는 결국 생산성 저하, 소비력 감소로 인해 공황과 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결코 자신의 이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생산관계의 악순환 속에서 노동자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무력으로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의 토대인 생산관계를 변혁하여 무너진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사상은 공산주의 태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초 러시아 노동운동의 지도자 레닌에 의해 보완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는 실패한 이론이며, 그 허구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21세기에 접어들어 생명력을 잃었다.
『원리강론』에 따르면, 인간시조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각각 악(惡)과 선(善)의 표시체가 되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본연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악의 표시체인 가인이 선의 표시체인 아벨에게 순종굴복하여 일체를 이루어야 하고, 이 기반 위에서 참부모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이래로 가인과 아벨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화해의 노력은 ‘가인형 인생관’과 ‘아벨형 인생관’으로 나뉘어 다양한 층위(層位)의 인간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돼 왔다. 오늘날 가인형 인생관은 헬레니즘을 기반으로 신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성과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비판과 실증적인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높이는 인생관’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며, 이 가인형 인생관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공산세계이다. 반면에 아벨형 인생관은 헤브라이즘을 기반으로 신(神)을 지향하며 ‘본성의 내적인 추구’를 통한 ‘창조본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을 가리키고, 아벨형 인생관의 삶이 축적되어 오늘날 민주세계가 도래했다고 본다. 따라서 20세기 민주세계와 공산세계의 대립 종식과 화해는 참부모 도래에 앞서 반드시 성취돼야 하는 섭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형제간의 다툼을 끝내고 참부모를 중심으로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의 이상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문제는 철저히 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토대로 인간의 의식이 결정된다고 본 점, 더 나은 생산력과 발전의 동력을 대립과 투쟁으로 설명한 점 등에 기인한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에 우선한 세계관을 펼쳤다는 점이다. 세계의 실체를 오직 물질로 보는 일원론적 유물론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와 통일을 이끌어 낼 수 없으며, 현실적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둘째로 폭력에 의한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사랑으로 운행하게 되어 있는 천리를 거역했다는 점이다. 생산관계의 변혁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성 회복을 구실로 인간을 도구화하는 또 다른 모순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