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감옥 수난
興南監獄 受難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재림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사명을 복귀하기 위해 흥남감옥에서 12명의 제자를 전도하며 사탄의 공인을 받은 탕감복귀의 노정.
[내용] 재림주를 맞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했던 신령집단들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어 참아버님이 직접 섭리적 중심인물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과 같은 길을 간 수난이다.
수감배경과 공판과정
참아버님은 1946년 삼팔선을 넘어 북한의 평양에 도착하여 교회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기독교 지도층과 공산당국 지도부의 야합으로 대동보안서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또한 하나님이 준비한 신령교단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아버님을 불신하였기 때문에 섭리적 중심인물로서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당한 것과 같은 탕감노정으로 43일간 영계의 시련을 당하며 하나님의 어인을 받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과 같은 길을 간 것이 흥남감옥의 수난이었다.
여러 핍박에도 불구하고 참아버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더 많이 모여들자 위기를 느낀 평양의 기독교 지도자들 83명의 공동명의 투서로 1948년 2월 22일 평양내무서로 긴급체포되었다. 혐의는 이승만의 스파이, 부녀자 재산 갈취, 사회질서 문란 등이었다. 수감 후 참아버님은 2월 25일 삭발을 당하였다. 함께 구금된 김원필 선생은 3일 만에 풀려나고, 옥세현은 9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참아버님은 4월 7일 열린 공판에서 사회질서문란죄로 단심 5년 형을 언도 받았다.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참아버님은 공판 당일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오히려 눈물 흘리던 식구들을 위로하며 투옥되었다. 이후 1948년 5월 20일 평양형무소에서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본궁리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었다. 본궁리 수용소는 흥남감옥이라고 불렸는데, 반동사상범이나 악질범죄자들을 각처에서 집결시킨 뒤 죄질과 형량에 따라 아오지 탄광이나 덕동 특별노무자수용소로 분류해 배치하던 곳이다. 수형생활이 힘들어 옥중의 옥으로 불리던 곳이지만 최종적으로 6월 21일 참아버님은 흥남시 덕리 덕동 특별노무자수용소, 일명 흥남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흥남감옥 수형생활
흥남감옥은 북한 당국이 유산계급이나 반공주의자들을 극한의 상황에서 혹독한 강제노역을 시켜 서서히 죽어 가도록 방치한 십자가 형틀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 뒷문으로 재소자들의 시신이 실려 나가던 사지와 같았다. 그런 곳에서 참아버님은 섭리적 중심인물의 자리에서 몸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찾아 세워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해야만 했다.
참아버님의 수인번호는 596번으로 억울하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평소의 생활은 새벽 4시 반에 기상해서 4킬로미터 거리의 비료공장으로 이동해 10인 1조로 하루에 40킬로그램의 암모니아 비료 가마니 1천3백 개의 운반을 반복하던 일과였다. 참아버님은 1천5백여 명의 재소자들과 함께 수형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기대를 쌓았다. 참아버님은 먼저 의식주를 주관하는 생활을 하였다. 흥남감옥의 식사는 하루 작은 밥공기 2그릇이 배급되었으며, 국은 무청이 든 소금물이 전부였다. 참아버님은 첫 날부터 석 달간 주먹밥 절반을 동료들에게 떼어 주고 배고픔을 극복하는 훈련을 했다. 또한 삼복더위에도 장바지의 차림으로 메시아의 몸을 보호하였다. 몸을 씻지 않고 식수 한 컵을 반쯤 남겨두었다가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고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변기통 옆 더러운 자리를 몸소 차지하고 희생하였다. 1년마다 40퍼센트의 재소자들이 죽어나가던 생지옥에서 다른 사람의 2배로 일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하였다. 공산당 주도의 독보회 시간에 감상문을 백지로 제출한 적이 있지만 1등 노동자 모범수로서 무사할 수 있었다. 간혹 면회하러 온 어머니 김경계 충모님이 정성을 다해 마련해 준 미숫가루와 명주 바지를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며 위하는 생활을 실천하였다.
영계가 협조한 기반 위에서 옥중의 열두 제자들 전도
이러한 생활을 통해 참아버님은 믿음의 기대를 쌓을 수 있었다. 믿음의 기대 위에 참아버님은 수형생활 중 영계의 협조를 받으며 12명의 수인들을 제자로 전도하였다. 박정화(朴正華, 총반장), 김원덕(金元德), 김진수(金鎭洙, 목사), 문정빈(文正彬), 김남선(金南善, 조장), 주창욱(朱昌郁, 반장), 정춘식(鄭春植, 반장), 박명환(朴明煥, 반장), 김연옥(金然玉, 반장), 김승태(金承泰, 반장), 김영식(金永植, 반장), 조승렬(趙承烈, 반장) 등이 전도되었다. 이들은 매일 아침 출역시간 감시의 눈을 피해 참아버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미숫가루를 숨겨 와 평소 또는 생신날에 건네 주기도 했다. 참된 사랑의 인연으로 지옥 밑창에서 메시아로서 재출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 발발과 흥남 폭격
참아버님이 수형생활을 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했다. 유엔 16개국 참전으로 민주 진영의 연합군과 공산 진영의 북한군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수세에 몰렸던 연합군이 인천상륙 작전 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여 북한의 대표적 공업도시 흥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1일 백 대 이상의 B-29기가 네 시간 동안 흥남공장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당시에 참아버님은 주변 직경 12미터 이내를 지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 사회의 노동자들 2천7백 명, 수인들 270명이 사망한 가운데 참아버님은 폭탄 파편들이 흩어지던 마당의 한복판에서 엄숙히 앉아 피해 없이 생존하였다.
당시의 흥남감옥에서는 10월 10일 연합군이 원산을 탈환하고 흥남에 상륙하자 12일부터 형기 7년 이상 수인들을 산 속으로 데려가 처형하고 있었다. 당초에 형량 5년 형을 언도 받은 참아버님의 차례는 10월 1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인 10월 14일 새벽 2시 미국 B-29기가 폭격을 개시하였다. 참아버님은 하나님의 참아버님 구출작전이라고 명명하였는데, 흥남폭격으로 참아버님이 기적적으로 출옥할 수 있었다. 옥중생활에서의 승리로 하나님의 실권 행사에 의해 무사히 석방되셨다.
흥남감옥 석방과 식구 수습
참아버님은 출감 당시 노동을 하면서 입었던 옷을 이불 보따리에 담아서 나왔다. 와이셔츠, 런닝셔츠, 팬티 등 유산이나 암모니아 산이 묻어 비비면 가루가 될 정도로 삭은 옷을 역사의 증거품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그 보따리에는 옥세현이 참아버님을 위해 머리카락을 끊어 만든 양말 두 켤레와 평양의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마련한 미숫가루 자루도 들어 있었다. 참아버님의 출감은 옥 중의 옥, 지옥과 같은 흥남감옥에서 최종 승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영계의 협조로 12명의 제자를 전도하여 메시아 섭리를 위한 재출발의 기대를 홀로 마련한 것이다. 참아버님은 무사히 풀려난 후 성가 ‘성려의 새 노래’와 ‘영광의 은사’ 2곡을 작사하였다.
참아버님은 곧바로 평양으로 갔다. 급박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40일간 평양에서 제자들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평양 노정의 흩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참아버님이 무사히 풀려났음을 알렸다. 고향의 부모형제도 찾지 않고 하늘을 두고 맹세했던 교인들을 찾으려고 정성을 다하였다. 흥남감옥의 옥중 승리로 참아버님은 남하하여 메시아 노정을 재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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