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환채
黃煥菜
항목체계
출신지 강원도 춘천시 서면 월송리 368번지
성별 남 생년월일 1931.3.27
[정의] 초창기 전도와 선교에 헌신한 36가정 원로.
[내용] 연세대학교 재학 중 입교하여 퇴학처분을 받은 뒤 전도와 선교에 헌신한 36가정 원로이다. 1931년 3월 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뒤 초등학교 때부터 성경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춘천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한국동란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종군하다가 1951년에 제대하였다. 이후 1962년 연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였으며, 광희문교회를 다녔다. 같은 교회의 찬양대원인 유경규의 인도로 1954년 10월 29일 ‘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1955년 7월 7일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연세대로부터 퇴학 통보를 받았다. 백방으로 부당함을 피력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7·4사건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고 계시던 참부모님을 생각하며 성가 ‘내 가오리다’를 직접 작사하여 ‘뜻을 안 이상 이 길을 끝까지 가면서 따르고 모시겠다.’는 맹세의 심정을 담았다.
1957년 11월 전라 지구장을 지낸 이후 전북 지구장, 경남 지구장, 1965년 11월 협회 학생부장으로 헌신하였다. 참부모님의 명에 따라 1966년 전국대학원리연구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71년 6월 협회 총무부장, 1977년 2월 제3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장을 역임했으며 1978년 2월 세계특별순회사로 시무하였다. 1979년 일화생수(주) 부사장과 흥영수산·흥영 I.O.E. 사장, 1988년 와이키키호텔 사장과 설봉호텔 사장을 겸임하였다. 1994년 5월 일본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총연합회장, 1995년 2월 세계일보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1996년 2월 24일 참부모님 공로패를 수상하였으며, 1996년 4월 카자흐스탄 국가메시아로 활동하였다. 1961년 5월 15일 박영숙과 36가정으로 축복을 받았으며, 2005년 12월 19일 성화하였다. ‘초통일부활권협조사(超統一復活圈協助使)’라는 휘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