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咸錫憲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종교가이자 사상가.
[내용]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의 종교가, 사상가(1901-1989)이다. 당숙부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는데, 여기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현재 츠쿠바대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으로 어떠한 종교적인 제도나 형식, 교리와 교회제도 등을 거부하였다. 당시 도쿄에서 함께 공부하며 뜻을 같이하는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자들의 동인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는 데 참여하였다. ‘성서조선’은 조선에서 무교회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주창했는데, 현실적인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의(義)’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던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2년 일제가 ‘성서조선’ 3월호에 실린 글을 문제 삼아 폐간하고 발행인과 독자 수십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때 함석헌도 체포되어 또다시 1년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이듬해 출옥하여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1947년 3월 단신으로 월남한 이후 종교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와 YMCA에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1956년 남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잡지 ‘사상계(思想界)’의 주필이 되었으며, 여기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다.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 대표로서 종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 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전력했다. 1987년 제1회 인촌상(출판언론부문)을 수상하였으며, 1989년 2월 4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2002년에는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