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浸禮敎 / Baptists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자발적 신앙고백을 한 사람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개신교의 한 교파.
[내용] 신약성서의 내용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한 사람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침례의 방식은 ‘침수례’(浸水禮)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동교단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유아 세례는 인정되지 않는다.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영국 청교도의 여러 교파들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교직자로 있던 J. 스미스(1554-1612)였다. 그는 1608년 국교회의 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 첫 번째 침례교회는 스미스의 주도로 암스테르담에서 ‘신자의 교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스미스의 동료였던 T. 헬위스 등이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영국에 이어서 미국에도 침례교가 널리 전파됐는데, 최초의 침례교회는 1639년에 로저 윌리엄스가 설립한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교회였다. 18세기의 ‘대각성운동’ 이후로 회중교회에서 침례교회로 넘어온 신도들에 의하여 미국 전역에서 크게 성장하였으며, 1800년 무렵에는 신대륙에서 가장 큰 교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45년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의 갈등으로 남침례교와 북침례교로 분열하였다. 한국에서 침례교회의 역사는 1889년 캐나다의 펜위크(Malcolm C. Fenwick)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함남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한국순회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원산에 이어서 충남 공주와 칠산, 강경에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의 우여곡절 끝에 1951년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이 설립되었다. 1959년 한국 총회와 미국 남침례회 선교회의 갈등으로 교단이 분열되어 포항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한기독교침례연맹’과 대전지역 중심의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으로 분리되었다. 1968년 분열된 두 그룹이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됐고,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가 있다.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과 침례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역사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있다. 16세기의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관심은 교회론이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다. 동시대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심각한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은 침례교도들이었다. 침례교는 유아 세례가 아니라 ‘신자의 침례’를 근거로 하는 ‘신자의 교회’를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교회라고 보았으며, 철저한 정교분리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였다. 가장 초기의 침례교 신앙고백서들은 이러한 자유교회 전통의 기본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교회 정치의 형태는 회중주의를 지향하였으며, 지역교회의 자치주의를 중요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침례교의 직위는 목사와 집사의 두 직위가 있다.
☞ ‘침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