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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 12월에 이루어진 천원사 창립 60주년 기념 "내 인생의 말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청주교회 안동헌 식구님의 에세이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작품에서 필자는 참부모님께서 실천하고 이루신바, 말씀을 토대로 

생활 가운데 실천했던 경험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안동헌

430가정, 청주교회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말씀인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밥 주관 


밥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습니다. ‘밥보다 민족과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라며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049-074, 1971.10.03)



저는 아버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70년 12월 1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리로 축복가정부인 3년 전도를 나갔습니다. 금촌리 교회는 산 위에 있는 작은 초가였고, 작은방인 교회장 집무실과 성전으로 사용한 큰방이 있었습니다. 좁은 마당 옆에 있는 큰 항아리에 산 아래 공동우물에서 길어온 식수가 있었습니다. 물을 길으러 마을 공동우물까지 200미터 경사진 길을 지게를 지고 다녀야 했습니다. 


교회장님은 개인사정으로 교회를 접고 떠났습니다. 12월 1일, 임지에 도착한 제가 뒤늦게 임지에 온 12명 중 조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전도대원의 경제사정이 원만치 않아 남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 2,000원도 제때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수리 및 제반 비용을 생활비에서 이용하다보니 식비가 부족해졌습니다. 항상 밥은 보리밥이었으며, 양이 매우 적었습니다. 큰 알루미늄 그릇에 밥을 담아놓고 둥그렇게 둘러 앉아 소금물에 콩나물 두세 개 들어 있는 콩나물국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웃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문득 참아버님 말씀이 생각나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배가 고파도 배고픈 것을 잊고 못 먹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밥을 안 드셨던 아버님의 참사랑을 생각하며 부족한 밥을 놓고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수저를 놓아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지만 우리 대원들은 항상 웃음꽃을 피우고 즐거웠습니다. 그때 참부모님께서 순회 오셔서 “지내기에 괜찮으냐?”라고 물으시며 격려하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 다녀가신 뒤로 대원들 모두 1명씩 전도를 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물을 길어다주며 대원들의 생활을 도와주었고, 의정부교회 7일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저희는 참부모님께서 순회하실 때 파주군 금촌리에서 의정부까지 믿음의 자녀와 같이 8명이 135리를 걸어서 참석했습니다. 저희들은 나날을 웃음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마치며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지나자 저에게 있던 위장병이 사라지며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부족한 제가 조장이 되어 참부모님의 은사로 12명의 전도대원들을 사랑하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습관이 되어서 어디서든지 음식을 앞에 놓고 먼저 손이 가지 않고 겸허하게 음식을 대하며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2004년 어느 날, 한 신문기자로부터 청주에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10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YMCA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수업은 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의무적으로 한글을 가르친다면 배우는 학생들이 싫증을 느껴서 수업의욕이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조금이라도 나누며 같이 웃고, 수업도 서로 도우며 같이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학생이 홍시 한 개를 가져와 “선생님, 드세요.” 하고 주었습니다. 다른 과일보다 홍시를 좋아하는 저는 혼자 먹을 수 없어 홍시를 조각조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절대로 자기 먼저 안 챙기네!”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당시에 인연된 한글반 학생들이 축복을 받았고, 매년 스승의 날에 “선생님!” 하며 인사를 오고 가정의 대소사를 의논합니다. 


2018년 10월 14일, 신한국 제3지구 희망전진대회를 청평에서 할 때의 일입니다. 믿음의 자녀 홍성달, 김연순의 신종족메시아 선포식에 90명 인원을 동원하고 버스 2대를 대절하여 청평을 갔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주차장으로 가서 개인도시락을 나누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주차장에 도착하지 않아서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도시락 50개가 전부 없어졌습니다. 밥이 맛있는 찰밥이어서 더 가져간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군! 배가 많이 고팠는가보다!”라고 말했더니 다행히 옆 차에서 밥이 남았다고 가져와서 먹었습니다. 만약 밥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저는 기뻤을 것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신종족메시아를 출발하는 선포식 날이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밥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밥을 주관해야 한다고 하시며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라고 하신 말씀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수면의 주관


나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않습니다. 그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바쁠 때는 하루에 1시간만 자도 됩니다. 잠을 자는 데 있어서 인류역사 가운데 잠을 제일 적게 자는 대표자가 나일 것입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197-163, 1990.01.13)



1980년대에 선배가정 3년 동원활동을 할 때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에 저는 경기도 구리읍 인창리가 360호 가정교회의 임지였습니다. 구리교회와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 능선이 흘러내리는 농촌을 끼고 가내공업들이 들어선 지역입니다. 도심지를 뒤로한 개발도상 상태였습니다. 집에서 임지까지의 거리는 20~30분 정도 걸어가야 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승공신문이나 부흥회 전단지 등을 가지고 가가호호 방문하였습니다. 임지에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믿음의 자녀가 준 코트가 가방에 쓸려서 보풀이 일었습니다. 이것을 구리교회 김도순 전도사가 보고 “저것 봐라, 코트가 닳도록 가방을 메고 다닌다.”라고 했습니다. 


임지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찾아 그들의 고무신을 닦아주고 어르신들의 요강도 씻어드리며 자식과 형제처럼 희로애락을 같이했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산 능선을 걸으며 ‘한없는 은사를 나에게 주시고~’ 성가를 불렀습니다. 산비탈 배나무 밭에 배꽃이 활짝 피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늘부모님의 위대한 창조성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여러 사람들이 저를 따라 구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배가정 3년 동원활동이 있었습니다. 한국협회에서 전국 식구 중 3명을 기존에 활동하던 임지로 발령하였는데, 우리 부부는 활동하던 곳이 임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활동하던 지역에 믿음의 자녀 황재찬, 최명님 부부의 집과 상가를 무상으로 도움 받아 성전과 거주지를 준비하여 임지에 정착하였습니다. 우리는 곧 자립교회가 되었고, 식구들도 100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이 되자 교회와 집을 마련해주었던 가정의 남편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겨 횡설수설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하다가 참부모님의 말씀이 서광처럼 스쳤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저희 부부는 그의 부인과 함께 40일 철야정성을 밤 12시에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4시간 기도를 드렸습니다. 40일 철야기도를 올리면 좋아졌다가 가을바람이 불면 다시 정신질환이 재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40일 정성이 끝나면 다시 40일 정성을 시작하여 약 3년간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참부모님의 잠 주관 말씀을 따라서 철야기도를 하는 것이 은사가 되어 잠자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5분만 깜박 졸아도 몸이 개운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잠을 짧게 충분히 자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천보자아주관의 길


성화하기 1년 전 90세를 훌쩍 넘긴 연세에도 여덟 차례 넘게 미국을 왕래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일했습니다. 교회 식구들은 물론 청년 식구들에게 인내심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거친 바다에서 며칠 동안 밤을 새우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훈독회(訓讀會)를 할 때면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너무 많아 열 시간을 넘기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23쪽)



참부모님께서 저희를 위해 심신을 투입하신 말씀을 따라 청주지역 위주로 16, 17, 48, 이렇게 3개의 훈독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16그룹은 20명의 청소봉사단체이고, 17그룹은 9명의 전 새마을부녀회원이고, 48그룹은 5명의 지인들로 돼 있습니다. 이들은 코로나19 발발 전 월 1회 훈독 모임을 하였습니다. 전국 각 지역에 믿음의 자녀와 종족들은 2019년 2월부터 2020년 11월 현재까지 저녁 7시에서 10시 사이에 청주, 서울, 춘천, 충주 등지에 사는 믿음의 자녀들 20여 명과 전화로 《원리강론》, 참아버님 자서전, ‘원리원본’, 《참부모님 생애노정》 등 완독을 마치고 현재는 청주 훈독회장단 중심으로 6명이 《천성경》, 《참부모경》, 《평화경》, 《세계경전》, 참어머님 자서전 등을 2천600여 회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훈독회장단들의 하루 생활을 점

검할 수 있었고, 내일을 계획하며 서로의 심정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원리를 모르면서도 30~50년 사회봉사를 한 분들입니다. 《천성경》을 훈독하며 “내가 청년이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깊은 숲속의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처음에 이 길을 낸 사람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쳐내면서 손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 길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첫 사람의 노고에 깊이 고마워하면서 길을 더 넓고 평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평화의 어머니 316쪽)


저는 어머님 말씀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어머님 말씀처럼 평화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지.’ 다짐하며 전화훈독에 이어서 저희 430종족 중심멤버들과 비대면시대에 필요한 온라인 종족교육활동을 계획하였습니다. 2020년 11월 4일부터 3명이 기초작업으로 매주 수요일 밤 9시에 줌(zoom)으로 영상훈독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원리책을 붙들고 울어봤습니까? 일생은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안 옵니다. 시집 장가를 가서 아들딸을 낳게 되면 짐을 지고 손수레를 끌고 허덕이다가 그냥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199-190, 1990.02.16)


“원리 강사가 됩시다. 남북통일 강사가 됩시다. 참사랑 강사가 됩시다. 앞으로는 강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2020년 11월 1일부터 참어머님께서 주재하시는 미래인재 양성을 본받기 위하여 430종족 청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사 양성에 나서서, 주1회 일요일 예배 후 현재는 4명이 강의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생활은 매일 새로운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새로워야 됩니다. 하늘은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것을 믿고 실천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세계적인 판도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249-204, 1993.10.10)


저희 부부는 ‘자아주관’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참부모님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을 마음에 새기며, 참어머님의 억겁(億劫)의 노정을 본받겠습니다. 목표를 세워 진행하며 ‘자아주관’을 완성하겠습니다. 참부모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