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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WONSA

청파랑

아직 뱀의 꼬리처럼 살아있는 추위로 다시 움츠러드는 3월.

봄을 봄이라 이르기 난감할 때도 화신花信은 맵찬 바람을 타고 북상한다. 이때쯤이면 새로운 계절을 앞서던 마음은 으레 고개 내미는 생명체를 살피게 마련.

합장한 두 손으로 똥꼬 찌르듯 언 땅을 밀친 틈새에서 보이는 초록의 정체.

긴 잠에서 막 깨어 기지개 켠 사연을 들어보라는 듯, 눈 깜짝할 새에 두 손 벌린다. 예열이 끝났나, 이윽고 주체 못할 노란 진물 머금은 깃대에서 칼바람 헤치고 황금색 등불을 켠다.

바람에 흔들리는 저, 제비보다 이른 봄 길의 앞잡이. 게 누군가.

수선화! 내년에 다시 보자던 그 말, 무심하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예단을 조롱하듯 혹한의 강을 건너 다시 지난해의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살면서 늘 ‘작은 약속일지라도 지키자’라는 나의 신칙은 얼마나 위선적이었던 것인지.

저 혼자 애썼을 수선화가 고맙다. 잘 버티었구나, 살아 주었구나, 안심의 미소가 돈다.


거침없이 바르고 결단성 있게 행동함을 ‘겨울 같은 기운’, ‘결기’라 하던가.

겹치고 겹쳐 모아진 잎의 힘으로 대지를 들어 올린 결기가 가상하다.

양파처럼 수십 겹의 비늘로 이루어진 알뿌리는 강력한 후원자. 수십 겹의 중심에 생명을 온존하여 빙하기가 닥쳐도 견딜 수 있다는 듯 당당하다. 알뿌리를 그답게 한 것은 하방에서 양분을 공급해준 수염뿌리이다. 근본이 든든한 구조를 갖추었기에 변화무쌍한 기온 속에서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 장사다.

잎은 뿌리의 정수리에서 개별적으로 돋기에 줄기가 없다. 대신 넓고 두툼하다. 그 안엔 얼지 않을 순수액을 가득 채웠다. 설한풍을 물리칠 치밀한 준비다. 대칭을 이룬 잎들을 사열하며 가운데에서 꽃대가 꼿꼿이 솟아오른다. 부챗살 매스게임이 완성된 듯싶어 박수를 치려 하자 잠깐! 환한 꽃이 영광을 드러낸다.

비로소 봄이다.

꽃잎은 6장. 가운데에는 왕관처럼 생긴 또 하나의 꽃, 덧꽃부리가 솟아 있다. 따지고 보면 안으로 온기를 모아 생명의 샘을 보호하는 부속 장치다.

가끔은 자신을 뜨겁게 사랑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려면 내 안에 덧꽃 하나 갖추라는 뜻. 허접한 나르시시즘을 철저히 배격한다.

불염포를 보자. 꽃송이의 목 줄기는 지푸라기 같은 불염포가 보호하고 있다. 애초 개화를 앞둔 시기에 꽃봉오리를 감쌌던 그것이 이제는 꽃이 질 때까지 꽃대와 꽃자루의 경계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역할로 변신했다. 살짝 당겨보니 질기고 단단하다.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충성의 의지가 아주 강하다. 큰 꽃이 꺾이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이다. 이것이 목에서 이어진 둥근 씨방 부위에선 진눈깨비와 과도한 햇빛의 피해를 막는 천막 역할을 한다. 뿌리에서 물 한 방울 지원받지 못하는 죽은 조직이 이런 멀티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인다니 참, 기가 막힌다.

화려함의 이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영광을 드러내는 저 아우라에 눈길이 간다.

그나저나 화무십일홍인데 벌·나비는 언제나 찾아오려나.




노란 진물 머금은 꽃봉오리가 잎과 부채모양으로 솟았다.



꽃잎은 6장. 가운데에는 왕관처럼 생긴 덧꽃부리가 솟아 있다. 꽃 뒤 목줄기의 씨방 주위는 불염포가 보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