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연구회와 청년연합 회장, 선문대 총장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젊은 청년들과 함께한 김봉태 회장(2015년 성화)의 유고집입니다.
생전에 남기신 육필원고를 기반으로 김명희 사모님이 오랜 시간 원고를 다듬어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증산신앙을 하던 집안 내력과 영계 체험 이후 참아버님과 만남, 대학가에서 활동을 담은 8개 장에 김명희 사모님의 글까지 전체 9개 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진은 별도의 화보로 구성하지 않고 본문 전체에 내용에 맞게 배치하였고, 부록으로 저자의 삶을 지켜본 지인들의 소회와 가족들의 글을 실었습니다.
특히 공적인 삶을 살다간 아버지에 대해 쓴 장남의 추모 글이 눈에 띕니다.
김봉태 약력
1944년 만주에서 출생
1968년 통일교회 입교
1969년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졸업 동대학원 철학과 졸업
1970년 전국대학원리연구회 장안학사장
1970년 배우자 김명희와 777가정 축복
1975년 제4, 6대 전국대학원리연구회 회장
1986년 문선명 총재 특별보좌관
1994년 세계평화청년연합 회장, 세계회장
1997년 사단법인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 회장
2005년 김씨문중총연합회 공동회장
2005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2005년 선문대학교 명예교육학박사
2005년 미국 UTS 명예 신학박사학위 취득
2006년 선문대학교 총장
2008년 폴란드 분봉왕
2011년 충남대전 및 호서지역총장협의회 회장
2015년 71세를 일기로 성화, 참부모님, ‘祝 祖國光復 必勝 奉身 代表者 되소서’ 휘호 하사
수상
2003.2. 천일국 주인상
2008.5. 참부모님 모범가정상
2013.2. 참부모님 기원절 특별공로상
저서 및 논문
《함께 사는 통일의 길》, 《성교육의 이론과 실제》 외 다수
「변증법적 유물론의 비판적 연구」,「인류생존의 환경, 순결교육 그 대안을 찾아서」 외 다수
격려사 | 김영휘 4
발간사 | 김봉태·김명희 6
추모의 글 | 김형철 10
추모시 | 정해철 15
제1장 섭리를 만나기 전 삶과 신앙
24 출생과 어린 시절
28 소년 시절 영계 체험
34 청년 시절 향학열
39 새로운 세상에 눈뜨다
제2장 대학가에 통일원리를 심다
46 참아버님과의 첫 만남과 공직 출발
55 전국대학원리연구회 태동과 학사장 발령
61 피땀으로 장안학사를 일구며
79 학사에서 만난 귀한 인연들
제3장 카프 책임자가 되다
86 공산주의 비판 강연과 한일 승공 세미나
89 대학순회전도단 발족
91 카프 창립 10주년과 대대적인 대학가 강연
99 문화예술 활동과 전국대학연합잠수회
103 카프 21일 수련회와 캠퍼스 처치 활동
105 농어촌 의료봉사 활동
109 카프 세계대학생총회와 월드 카프 출범
118 월드 카프 조직을 위한 세계순회
제4장 참부모님 특별보좌관이 되어
128 참부모님 특별 수행보좌관 명을 받다
133 2세들의 성지순례 인솔과 해양수련회
138 UTS 입학으로 새롭게 불붙은 향학열
141 월드 카프 베를린 대회 참가
147 제6대 한국 카프 회장으로 돌아오다
제5장 참어머님 대학 순회강연과 청소년순결운동
156 참어머님 전국 40여 개 주요 대학 순회강연
163 참어머님 제2차 대학가 순회강연과 절대 성 운동
169 세계평화청년연합 창설과 조직
181 순결운동본부 초대 본부장을 맡아
185 전국 초중고교생 순결교육과 순결다짐식
188 세계평화순결민족연합 창립과 순결글짓기 대회
제6장 국제대학생지도자 평화 세미나
196 공산주의 종주국 모스크바에서
204 ‘서울 불바다’ 뒤덮은 우리의 소원
212 통일 향한 대장정 오르다
217 참부모님에 대한 남북의 신뢰
219 피는 물보다 진하다
격려사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물
김영휘(전 협회장, 전 천의원장)
우리 통일가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봉태 총장은 매우 인상적인 분이었습니다. 그의 첫인상은 온화하지만 단호한 성품을 소유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지도자나 목회자와는 달리 평생을 시종일관 젊은 청년들과 함께했습니다.
원리연구회 학사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직의 길에 들어섰는데 원리연구회 중앙회 회장, 세계평화청년연합 회장, 순결운동본부 회장 그리고 말년의 선문대 총장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직분은 한결같이 젊은 청년들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 그가 없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회상됩니다.
추모의 글
봉태 형, 회장님, 총장님, 그리고 아버지
장남 김형철
난생처음 아버지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새하얀 워드프로세서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노트북을 접기 일쑤였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와 보낸 추억을 회상하며 함께했던 시간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손쉽게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조언을 따라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추억의 발자취를 더듬어 봅니다. 그러자 그 속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때, 어릴 때는 아빠 그리고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의 흔적은 정작 아버지란 말보다 다른 호칭들이 저와 아버지 사이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봉태 형…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무렵,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 삶의 대부분은 전국대학원리연구회(CARP) 또는 세계평화청년연합 회장으로 봉직하실 때였습니다. 격랑의 시대에 대학원리운동에 뛰어들어 젊은 청년들과 언제나 함께하셨기에 아버지는 본인 나이와 회장이라는 직책에 관계없이 ‘봉태 형’으로 불리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카프 활동 당시 아버지를 다른 선배들처럼 ‘봉태 형’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저와 아버지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대변하는 호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인생의 많은 세월을 카프 회장으로 계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남북대학생통일세미나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훗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일을 영웅담처럼 들었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당시 봉태 형은 말이지…” 하며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님은 제가 귀가해서 만나는 평범한 아버지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봉태 형’이라는 아버지 이미지는 얼굴을 감춘 또 다른 히어로가 아닌가 싶습니다.